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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시행…주·조연·카메오·신스틸러 누구?

[the L 리포트]보기 드문 역사적 '입법 드라마'가 연출된 김영란법 제정에 참여한 주요인사들 짚어보기


김영란법 시행…주·조연·카메오·신스틸러 누구?왼편부터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 이완구 전 총리, 김용태 의원, 김기식 전 의원/사진=뉴스1


28일 시행에 들어간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은 최초 제안자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외에도 입법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정치권·법조계 인사들이 적지 않다.

2012년 8월 권익위가 법안 초안을 내놓은 이후 어떤 이들의 입과 손을 거쳐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한 김영란법 시행이 4년여만에 이뤄지게 됐는지 머니투데이 더엘(the L)이 정리했다.

◇주연: 김영란 없었으면 김영란법 없다

김영란법은 2012년 8월 김영란 당시 권익위원장에 의해 제안되면서 시작됐다. 대법관을 역임했던 그는 30여년의 판사 생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정청탁문화가 만연한 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김영란법은 일견 내용면에서 당위성을 지녔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일각에선 시행에 들어간 지금도 입법만능주의에서 나온 3류입법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과도한 입법으로 전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런 점에서 김영란이 아니었으면 김영란법은 애초에 제안되지도 않았을 것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여성 법조인 출신이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공직사회에서 수십년간 생활하면서 느낀 관행적인 부패와 비리에 대해 더 민감하게 생각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런 점에서 김영란법의 태생에는 개인 김영란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처음 제안됐을 당시 법무부의 반대 등 정부간 이견으로 정부입법안으로 내놓기에는 어려운 이상론적 입법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입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김영란은 권익위에서 김영란법을 제안한 바로 다음 달인 2012년 9월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의 대선 도전을 이유로 사직하게 된다. 이후 김영란법 입법과정은 김영란의 손을 떠났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국회를 통과해 결국 시행에 들어갔다.

◇조연급 씬 스틸러: 이완구 인청 없었으면 김영란법 통과 안 됐을 것

김영란법은 처음 제안됐을 때부터 내용은 '당위'를 말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먼 '이상론'이란 점에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정부도 방향성에는 동의했지만 속으론 내심 통과를 꺼렸다. 심지어 정부내 이견으로 국무회의도 권익위 입법예고안이 나온지 1년여만인 2013년 7월말에서야 통과했다.

2013년 8월 국회로 넘어온 김영란법은 '법률'의 형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국회 논의과정에서 더욱 '겉과 속'이 다르게 작용하는 묘한 기류가 있었다.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겉으로는 법의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당장 우리 사회에 적용하기엔 시기상조라거나 부작용이 우려돼 문제가 많다는 인식이 컸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에서 논의가 진전되지 않을 때에는 국회에 통과 촉구를 했지만, 통과이후 정작 시행을 앞두고선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했다. 따라서 김영란법은 정치인들에게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지만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다로운 이슈였다. 소위 '포퓰리즘' 입법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민 여론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된 김영란법에 대해 터 놓고 얘기하기 힘들었던 당시 상황은 국회 입법과정을 지지부진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여야가 담당 상임위인 정무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란만 키우던 상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세월호 참사와 이완구 총리 인사청문회였다.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황에서 터진 세월호참사는 관피아와 정경유착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반성과 각오로 작용했고 김영란법 추진 동력이 됐다.

여기에 상임위 통과 후 본회의 통과여부가 불분명했던 때에 이완구 총리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녹취록 논란은 김영란법에 기름칠로 작용했다.

야당이 지난해 2월 10일 인청 과정에서 공개한 녹취록에는 이완구 전 총리가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김영란법 때문에 기자들이 초비상이거든, 안 되겠어 통과시켜야지…내가 막고 있는 거 알고 있잖아 욕먹어 가면서…여러분도 친척들 때문에 검경에 붙잡혀 가서 당해 봐…지금까지 내가 공개적으로 막아 줬는데 이제 안 막아 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녹취록 공개 후폭풍으로 국회가 인위적으로 통과를 안 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줬고,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국회내에서 김영란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목소리는 사실상 사라졌다. 김영란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곧바로 부정부패를 옹호하는 것처럼 여기는 대중 여론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결국 인청 녹취록 파동이후 채 한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해 3월 3일 국회 본회의에서 91.5% 라는 압도적 찬성율로 통과됐다.

김영란법 시행…주·조연·카메오·신스틸러 누구?임시국회 마지막날인 2015년 3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안)이 재석 247인 중 찬성 226인, 반대 4인, 기권 17인으로 가결되고 있다./사진=뉴스1



◇조연: 김용태·김기식, 19대 여야 정무위 간사

정무위 법안소위에서 김영란법 논의를 주도했던 여야 간사도 조연급 주요 인물이다. 상임위 체제에서 간사 역할이 큰 만큼 19대 정무위 카운터파트너였던 김용태 새누리당 간사와 김기식 더불어민주당 간사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권익위 초안이 정부를 거쳐 국회에 제출된 뒤 입법과정에선 둘의 궁합에 따라 김영란법의 모습이 바뀌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의 과정에서 민간영역의 사립학교와 언론까지 포함돼 논란이 제기됐고, 그런 확대 과정이 사실상 법안 통과를 어렵게 하려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결국 법안은 정무위에서 격론 끝에 성안됐다.

당시 정치권이 김영란법 통과를 주저한다는 언론 비판에 직면하자 언론을 적용 대상에 포함 확대하는 수정안을 내놓으며, 입법지연에 대한 언론의 비판에 방어막으로 쓴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과잉 입법 혹은 포퓰리즘 논란 속에서도 여야 간사는 결국 합의하에 법안 심사를 완료하고 공을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로 넘겼다. 김용태, 김기식 양 간사는 이 과정에서 소극적·방어적 입장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법안을 수정하고 심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현재 시행되는 김영란법의 구체적 범위에 둘의 의사가 사실상 반영돼 있는 셈이다.

더미래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김기식 전 의원은 최근 김영란법 강의를 다니고 있기도 하다. 김 전 의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일부 개정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카메오: 스폰서검사, 벤츠 여검사, 헌재 재판관들, 국회 관계자


2010년 스폰서 검사, 2011년 벤츠 여검사 사건 등도 김영란법 입안의 근거로 쓰였기 때문에 해당 사건 관계자들도 일종의 카메오로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빼 놓을 수 없는 조연급 카메오다. 지난 7월 28일 헌재는 헌법소원이 제기된 쟁점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렸다. 국회 통과로 시행을 코 앞에 두고 있었지만, 내심 헌재가 일부라도 위헌 결정을 하리라 기대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김영란법 내용이 논쟁적 측면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마지막으로 김영란법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논란을 끝냈고 법시행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됐다.

국회 입법과정에서 김영란법을 담당했던 여야 간사실 등 주요 의원실 보좌진들도 실무적으로 카메오 역할을 했다. 김영란법은 처음 국회에 제출된 권익위 초안이 그대로 통과돼 시행에 들어간 게 아니다. 각 부처 의견, 여야 입장, 전략적 수정안, 정치적 이슈 등 때문에 처음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뀐 게 현재 시행되는 김영란법이다.

이 과정에서 수년간 담당 의원실 해당 보좌진들은 김영란법 변천사를 직접 다뤄야 했다. 디테일한 변화는 그들 손에서 나왔다.

그런 면에선 정무위 전문위원들도 빠질 수 없다. 실제 김영란법의 직접 적용대상인 '공직자 등' 개념에 최초 KBS, EBS라는 두 곳의 '방송공사'만 포함하는 것으로 제한됐었다가 공기관·사기업여부를 따지지 않고 전체 언론사로 확대된 데에는 '언론사간 형평성'을 지적한 전문위원의 역할도 있었다. 물론 정무위 양 간사 등 의원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지만 이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의사결정을 좌우하게 한 이들의 역할도 적지 않다.

◇"김영란법이라는 극적 입법드라마…'리메이크' 어려울 것"


김영란법은 이렇듯 4년여에 거쳐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슈에 영향을 받으며 입법됐고 결국 시행에 돌입했다. 정치권·법조계에선 두번 다시는 이런 독특한 형태와 혁명적 내용의 법이 또 만들어지기는 힘들 것이란 평가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김영란법은 내용과 형식면에서도 다른 어떤 법과 비교하기도 힘들만큼 특이한 케이스다. 주조연 및 단역으로 관여한 각 주체와 객체의 입장과 편견 그리고 전략과 실수가 모두 뒤섞이면서 보기 드문 역사적 '입법 드라마'가 연출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과연 입법취지에 맞게 우리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 정화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반대로 사회 혼란과 불신을 가져올 판도라의 상자로 작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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